박구환 '나무 올라타기'     by guhane (http://sea_of_sound)
박구환 '나무 올라타기' 부분 확대.(왼쪽) 박구환 '나무 올라타기', 나무에 설치, 종이컵, 2006.(오른쪽)  


이젤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한적한 길이지만 사실 야외 미술관의 일부였다. 이젤은 가슴을 활짝 펴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새가 친구인 줄 알고 “호오.”하고 따라 했다. 이젤이 다시 “호케코, 케코.”하자, 역시 휘파람 새도 “호케코 케코.”하고 따라 했다.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다.
이젤은 새들의 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참나무 숲의 한 그루 나무였을 때, 늘 새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잎이 무성해지는 초여름에는 유난히 많은 새들이 놀러 왔었다. 숲에는 부드러운 나뭇잎을 갉아먹는 작은 애벌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새가 운다.”고 말한다. 사실 새들을 조금만 관찰해 보면 이런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새는 물론 슬퍼서 울기도 하지만, 즐거워서 노래할 때가 많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기 위해 친구들을 부르고, 위험에 처한 형제에게 어서 피하라고 소리 지르기도 한다.

이젤은 휘파람 새를 보자 문득 옛날이 그리워졌다. 이젤이 살던 숲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이젤은 도토리 때부터 함께 자란 형제들, 사이좋게 늘어서서 햇볕을 쬐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이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늘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로는 달과 바람, 새들도 있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 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쟁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말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 이양하의 수필 ‘나무’ 중에서

이젤은 숲길 입구로 돌아와 잔디 마당에 앉았다. 마당가에는 몇 그루 소나무가 있었다. 이젤은 소나무 둥치를 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니, 나무가 옷을 입었나?’

나무는 빨강ㆍ파랑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흰색도 있었다. 겨울에는 간혹 추위를 피하기 위해 짚 따위로 만든 옷을 입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좀 이상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나무 둥치 위에 납작하게 구긴 종이 컵을 겹겹이 붙인 것이었다.

이젤은 이 설치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종이컵의 재료는 역시 나무다. 한번 쓰고 버리는 종이컵 때문에 많은 나무들이 베어지고 있다. 작가는 사람들이 함부로 쓴 종이컵을 나무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무는 종이컵 옷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어서 좋고,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종이컵이 원래 나무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고 함부로 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이젤은 종이컵의 둥근 바닥에 그려진 두 개의 점들을 눈여겨보았다.

“혹시 이 작품의 제목은 ‘푸른 돼지 코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

“재미있는 제목이야! 하지만 여길 봐.”

어느 새 나타났는지,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작가는 나무 둥치 아래 땅바닥을 가리켰다. 조그만 설명서에는 ‘나무 올라타기’라고 씌어 있었다.

“돼지가 나무에 올라탔다는 말인가요?”

작가는 뿔테 안경을 들어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 이 종이컵 하나하나는 모두 사람이야. 여러 사람이 나무를 오르고 있는 거지. 나무 꼭대기는 사람들이 도달해야 할 목표고, 모두 그 곳을 향해 물불 안 가리고 올라가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거야.”

“그럼 이건 돼지 코가 아니고 사람 눈이란 말인가요?”

작가는 역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젤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작품을 해석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 눈도 돼지 코로 보일 때가 있고, 때로는 단추 구멍으로 보일 때도 있는 법이라고 자신을 위안했다.




입력시간 : 2006-06-0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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