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의 느림의 미학     by guhane (http://www.guhane.com)
 

 

고요, 정적, 내면의 울림, 평화 등등. 한없이 편안하다. 아닌게 아니라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들판 너머로 바다가 있는 풍경, 자연스레 시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현대가 요구하는 질주, 속도, 빠름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질주하면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함이 우러나온다. 다름아닌 판화가 박구환씨의 작품 내용이다.

그의 판화를 들여다보면 바쁘게 살아온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너른 어깨를 척 내주며 안기라 한다. 느긋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은 그렇게 어서 오라. 손짓한다.



화면 속의 느림의 미학

우리는 그동안 내달리지 않으면 안될것같은 불안한 마음에 질주해왔다. 그 방향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내달렸다. 우리가 거둔 성장, 발전 등은 그 결과로 얻은 부산물이긴 하다. 그러나 그게 긍정적이기만 했을까. 아니다. 성장의 그늘이 짙다는 것을 뼈아프게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소소하지만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것들을 놓쳤다는 상실감마저 컸다.

때늦은 움직임이 일었다. 본질적인 질문을 날카롭게 들이대며 시정을 요구하는 움직임이다. 그 중 하나가 슬로우시티운동이다. 물론 쾌속 질주의 반작용이 심각하게 드러남으로써 속을 차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바른 방향을 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판화가 박구환은 일찍이 그걸 알았다. 그의 작품엔 전 세계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외치고 있는 "느리게 살기"가 진즉부터 꿈틀거리고 있다.

슬로 시티운동이요? 전 90년대 초반부터 그걸 작업에 담아왔어요. 단순히 목가적인 풍경만은 아니다. 곪아 터져있는 것을 감추듯 포장하려는 차원의 서정성이 아니다. 오히려 쓰라린 상처를 어루만지는 해원의 서정성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의 작업이 빛나는 이유다. 그래서 그의 풍경 판화가 요즘 뜨는지도 모른다.

특히 대만에서 알아봐준다. 그곳에서 초대전을 벌일 때마다 전시작 완매 행진을 거듭한다. 초대전, 기획전은 물론 국내외 아트페어에서도 그를 불러제킨다. 아니, 도저히 안돼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칠 정도다. 그 일정을 모두 소화하려면 그가 지향하는 "느리게 살기"가 안돼 갈등에 휩싸이기도 한다.

 

"소리의 바다"(Sea of Sound) 시리즈

잘 나가는 작가, 비전이 밝은 작가로 바쁜 그이지만 한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시장에서 반응이 없었을 때 이야기다. 정말 열심히 작업했었다. 공모전에도 출품한 지 수년 안에 대상까지 석권해 공모전 초고속 졸업이라는 레테르를 달기도 했다. 작업을 뼈빠지게 했다. 그렇게 공모전 추천작가가 되고 초대작가가 되면 무엇하랴, 시장이 반응을 하지 않고 생계유지조차 힘든데…

참 답답했다. 그래서 배낭하나 걸쳐메고 남도 해안을 주유했다. 이른바 강태공이 따로 없었다. 일주일도 좋고 열흘도 좋고 때론 두 세달도 좋았다. 움직임없이 낚시를 드리운채 바다만 응시했다. 그렇게 물고기를 낚던 그가 어느날 거기서 시를 퍼올렸다. 그렇게 퍼올린 시를 판화로 형상화해낸 것이 "소리의 바다"(Sea of Sound)다. 왜 "바다의 소리"가 아니냐는 질문에 빙긋 웃는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이는 바다가 아니랍니다. 대자연의 소리가 내 귀바퀴를 간질렀고 그 다음 소리가 엷어지는 순간 두 눈이 활짝 열리면서 대자연이 내 두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어요.청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그 순간의 감정을 박구환은 계속해서 설명한다. 밤새워 낚시를 하노라면 갯돌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귀에 쟁쟁거린다. 바다가 계속해서 토해내는 그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나중에 별 감각도 없어질 무렵 먼동이 트고 소리는 그대로 있는데도 엷어져간다. 그 순간 확 달려드는 자연이 눈으로 몰리고 시각적 트임의 자각을 얻게 됐다고. 밤새 청각에 시달린 후 아침이 돼 눈이 열릴 때면 환희 자체였다.

더구나 남도의 능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운 풍경의 숏이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어디다 숏을 치고 라인을 그어야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평범한 풍경이 되는가가 분별됐다. 모두 청각의 전쟁 끝에 거둬들인 성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청각이 시각으로 옮겨가면서 눈을 통해 거둬들인 것이 눈만을 통해 들어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소리의 바다"다. 그것은 멈춤과 머물러있음, 아니면 느리게 가기를 통해 그가 얻어낸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지쳐 울다가 고꾸라질 수 없다고 여기고 바닷가로 갔고 거기서 느림의 실천 속에서 옭아맸던 족쇄를 풀었다.  그리고 자연 깊숙이에서 시를 퍼올려 낸 것이다.

 그의 판화 "소리의 바다"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의 형상화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울림이 크다.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고 정취가 넘친다

착한 풍경을 자신의 판화에 집어넣은 계기다. 착한 풍경이 답답하기도 했다. 공모전을 치르면서 비구상적인 판화를 하다가 그림을 그린 것처럼 서정적인 풍경을 넣자니 작업하면서도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그 답답함에 대한 굴레를 2004년 미국 뉴욕 전시회를 통해 벗어던졌다. 처음 해외전을 나가면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현대 미술의 본고장인 뉴욕에서 바다 풍경이 펼쳐지는 시골스러운 판화를 내놓는다고 생각하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응은 아주 좋았다. 거기서 박구환은 희망을 보았다.

현지 미술평론가들과 언론은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고 정취가 넘친다."며 그 평화로운 풍경의 컨셉에 박수를 보내주었다. 현대 미술의 휘몰아치는 뉴욕미술계에서 구태의연한 풍경이 통한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게 됐다.

그러나, 박구환의 작업을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이게 판화냐고 놀라지만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이들은 답답해했다. 10년 넘게 변화없는, 비슷한 경향의 작업에 종지부를 찍고 변화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변할 순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테크닉의 완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변화의 욕심에 휘말려 내던지고 다른 것으로 옮겨가기는 싫었다. 누가 뭐라건 한없이 머무는 듯 싶었다. 테크닉이 절정에 오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열심히 찍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10여년 동안 300여점을 전시했다. 물론 그 중엔 전시되지 않고 보관 중인 작품도 상당수다.



8월 시안갤러리 초대전

스스로 변화의 물꼬를 튼 지 얼마되지 않는다. 그동안 세필의 느낌으로 화면을 꽉 채웠다면 이젠 표현의 핵심만 남기고 모두 날려버린 채 여백으로 처리한 문인화라고나 할까. 색을 바꾸고 조형 형태를 단순화시켰다.

한결같이 담백하다. 탈탈 털어버리고 꼭 남겨야 할 것만 슥슥 처리한, 그러면서도 깊은 여운이 남는 작품들이다. 배낭 메고 찾아가 느린 삶을 살다가 찾아낸 "소리의 바다"가 이제 작은 꽃송이들로 피어나고 있다. "한가로운 마을" 시리즈다. 모두가 느리게 살기의 맥락이다.

그 최근작들이 8월 시안갤러리 초대로 선보여진다. 빽빽이 채웠던 "소리의 바다"가 장엄한 자연의 오케스트라로 다가들었다면 신작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가슴을 칠 지 기다려볼 일이다.

글 김영순 광주매일신문 문화여성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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